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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이소 구니아키는 1880년 일본제국 야마가타현에서 출생해 1950년 사망한 육군장군이자 제 8대 조선총독, 그리고 총리대신입니다. 그는 관동군 참모장으로 예편하다 히라구마, 요나이 내각에서 식민지 장관을 지냈습니다. 1941년 일본이 진주만 공습을 시작으로 태평양전쟁을 일으키고, 1942년 동남아시아로 진출하며 최대 영토를 획득한 시기에 고이시는 일선에서 물러나 제8대 조선총독으로 부임하게 됩니다.

조선 총독으로 부임하던 시기 고이시는 [조선의 독립은 규슈와 훗카이도가 독립을 시도하는것과 같은 말도 안되는 소리다]라며 조선 독립을 결사반대한것으로 유명합니다. 1943년을 기점으로 일본의 공세종말이 드러나며 전세가 기울기 시작한 시점, 내각총리대신인 도조 히데키는 사이판 함락으로 사임하게 되고, 후임으로 고이시가 부임하게 됩니다. 

고이소가 임명된 1944년은 일본이 패망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레이테 해전을 통해 미국에 일격을 가한 후 강화조약을 맺는것을 목적으로 하였으나 일본제국의 고질적인 육해군의 대립으로 작전이 이어지지 않고 그의 꿈은 좌절됩니다. 그 이후 그는 중국 전선에서의 국민당 정부와 단독 평화 공작을 펼치지만 덴노와 군부의 반대로 이 역시 좌절되었습니다.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발발시킨 기본적인 사상은 아시아주의, 즉 서구 열강들의 식민지들의 [해방]을 통해 아시아의 화평을 가져온다는 것입니다만, 실상은 아시아는 일본제국의 영향권 하에 둔다는 내용입니다. 만주로의 진출, 그리고 군부의 단독적인 행동으로 인한 중일전쟁이 발발하며 이러한 일본의 명분은 흐려지게 됩니다. 

1940년 프랑스의 함락과 비시정부의 수립으로 기존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인도차이나는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이 틈을 타서 일본은 인도차이나에 군을 배치하게 되고 미국은 전략물자 금수조치로 대응하게 됩니다. 따라서 일본은 동남아시아의 고무, 석유와 같은 전쟁에 필수적인 자원 확보를 필요로 하게 됩니다. 

이러한 흐름을 타서 당시의 내각총리대신인 고노에 후미마로는 동아신질서를 발표하며 대동아공영권, 즉 아시아주의를 제창하게 되며 태평양전쟁을 발발시킵니다. 영국의 식민지였던 말레이 반도, 그리고 요충지였던 싱가포르가 손쉽게 함락되며 1942년에는 인도네시아를 점령하게 됩니다. 하지만 일본의 단독적인 행동뿐만 아니라 지속적인 공작을 통해 현지 독립운동가들의 선동이 있었습니다. 

일본의 협력자중에서는 아웅산장군과 수카르노도 있었고 그들에게 [독립]을 보장해주었습니다. 그리하여 1943년 도조 히데키 내각은 필리핀과 버마의 독립을 허용했고 각각 일본의 괴뢰국인 버마국과 필리핀국이 탄생하게 됩니다. 하지만 인도네시아의 독립은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1944년 일본 남방군이 치명적인 타격을 받으며 고이소 내각은 인도네시아인들의 일본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을 타개하기 위해 고이소 성명을 발표하게 되고 동인도 라는 장기적인 독립을 보장하게 됩니다. 하지만 군부의 주류파는 일본인 이외의 독립은 허용되지 않는다는 입장을 고수했고 수카르노는 독립전쟁을 펼치기 시작했습니다.

일본의 우익들의 주장에 따르면 태평양전쟁은 아시아 해방을 위한 [성전]이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위의 내용을 통해 짐작하자면 일본은 처음부터 아시아의 해방보다는 현지 자원의 수탈에만 집중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일본제국이 패망하고 [일본국]으로 수립된지 70년이 지난 지금에도 국내외에선 일본 우익의 의견을 따르는 학자들과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태평양전쟁은 대동아 해방전쟁이며 일본제국의 행위는 정당했다고 주장합니다. 일본의 역사수정주의자들이 아무리 노력을 해도 이런 진실은 변하지 않음을 알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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